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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 월정사 (전나무숲길, 팔각구층석탑, 방문팁)

by hks1000 2026. 4. 24.

월정사 법당과 팔각구층석탑사진

작년 가을, 연휴 끝자락에 평창 월정사를 찾았습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주차 자리가 없어서 한참을 위로 올라가서 겨우 차를 세웠는데, 그 불편함이 오히려 전나무 숲길을 걸을 수 있는 핑계가 되어버렸습니다. 걷기 시작한 순간부터 공기가 달랐고, 월정사에 닿을 무렵엔 이미 일상의 소음을 완전히 잊은 상태였습니다. 가을의 천년 고찰이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지, 직접 겪고 나서야 이해했습니다.

1.9km 전나무 숲길, 피톤치드와 함께 걷다

일주문에서 금강교까지 이어지는 약 1.9km의 전나무 숲길은 우리나라 3대 전나무 숲 중 하나로 꼽힙니다. 평균 수령 80년이 넘는 전나무 1,700여 그루가 양쪽으로 빽빽하게 서 있고, 가을 햇살이 그 사이를 비집고 내려옵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이게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었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알싸한 향이 폐부 깊숙이 박히는 느낌, 처음엔 그냥 좋은 공기라고만 생각했는데 숲을 다 걷고 나니 머리가 맑아지고 몸이 가벼워진 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이 향의 정체가 바로 피톤치드(Phytoncide)입니다. 피톤치드란 식물이 외부의 해충이나 균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방출하는 천연 항균 물질로, 인체에 흡입되면 스트레스 완화와 면역력 향상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 산림청 산하 국립산림과학원의 연구에 따르면 전나무 숲은 침엽수 특성상 피톤치드 농도가 활엽수림보다 높게 측정된다고 합니다(출처: 국립산림과학원).

전날 비가 와서 계곡물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고, 그 소리가 더해지니 몸과 마음이 단번에 정화되는 기분이었습니다. 숲길 중간에는 맨발 걷기 황톳길도 조성되어 있었는데, 요즘 맨발 걷기 열풍이 번지는 게 이유가 있다 싶었습니다. 저도 해보고 싶었지만 젖은 땅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게 아직도 아쉽습니다. 길은 유모차도 어렵지 않게 다닐 수 있을 만큼 잘 정비되어 있어서, 어르신이나 아이와 함께 방문해도 전혀 무리가 없습니다.

국보 제48호 팔각구층석탑, 고려 석탑 양식의 정수

숲길을 빠져나와 월정사 경내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팔각구층석탑입니다. 국보 제48호로 지정된 이 석탑은 높이 15.2m로, 우리나라 팔각형 석탑 중 가장 크고 화려한 탑으로 손꼽힙니다. 제가 폰으로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카메라 프레임에 탑이 다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한참 뒤로 물러서서야 전체를 담을 수 있었는데, 그 높이 자체가 보는 사람을 압도합니다.

이 석탑이 주목받는 이유 중 하나는 탑의 양식에 있습니다. 다각형 다층 석탑(多角多層石塔)이란 사각형이 아닌 육각형, 팔각형 등의 다각 평면을 기반으로 여러 층을 쌓아 올린 탑 형식을 말합니다. 통일신라 시대까지는 주로 사각형 석탑 기술이 완성되었고, 고려 시대에 접어들면서 이를 응용해 다층·다각의 새로운 형식이 꽃을 피웠습니다.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그 중에서도 한강 이북 고구려 전통의 팔각 형식을 계승하면서 신라의 석탑 기술을 접목한 결과물로, 고려 불교 문화의 귀족적이고 화려한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층마다 달린 풍경(風磬)이 바람에 흔들리며 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풍경이란 탑이나 처마 끝에 다는 작은 종 형태의 장식으로, 바람이 불 때마다 소리를 내어 사찰의 장엄함을 더하는 역할을 합니다. 저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 한참을 멈춰 섰는데, 고려인들이 이 탑을 세우고 지켜온 천 년의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마음속으로 가족의 건강과 아이들의 취업을 빌었습니다. 탑돌이를 하는 사람들도 꽤 많이 있었는데, 종교가 달라도 이 공간에서는 자연스럽게 고개가 숙여집니다.

1970년대 해체 수리 작업 당시 탑 내부에서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발견되었습니다. 사리장엄구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함께 봉안된 일체의 공양 물품을 가리키는 말로, 금동 여래 입상, 청동 사리합, 금동제 방형합 등 12점이 출토되었습니다. 총탄이 지나간 흔적이 탑 곳곳에 남아 있다는 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의 화마를 견뎌내고도 자리를 지킨 탑 앞에 서면,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정성의 힘 같은 게 느껴집니다.

적광전과 석조보살좌상, 그리고 방문 전에 알아두면 좋은 것들

월정사 적광전은 이 사찰에서 또 하나 눈여겨볼 공간입니다. 적광전(寂光殿)이란 원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시는 전각으로, 빛이 충만한 고요한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그런데 월정사 적광전은 특이하게도 석가모니불을 봉안하고 있습니다. 이는 오대산 전체가 석가모니 부처님이 상주하는 성지라는 의미를 담은 것으로, 저는 그 안에서 불상 뒤편까지 구경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찰에서는 불상 뒤를 볼 수 없는 경우가 많은데, 월정사에서는 그게 가능해서 꽤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팔각구층석탑 바로 앞에는 석조보살좌상이 오른쪽 무릎을 꿇고 탑을 향해 공양을 올리는 자세로 앉아 있습니다. 고개를 숙인 보살상을 보는 순간, 저는 이 모습이 어딘가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식 걱정에 밤잠을 설치는 부모님의 모습과 겹쳐 보였달까요. 월정사를 찾는 평범한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를 대신해주는 존재처럼 느껴졌습니다. 이 보살상은 법화경에 등장하는 약왕보살(藥王菩薩)을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약왕보살이란 온몸에 향유를 붓고 소신공양을 통해 중생의 병을 고쳐주는 보살을 가리킵니다. 전쟁의 총탄 흔적을 간직한 채 자리를 지켜온 이 두 유물이 한 쌍을 이루는 모습에서, 천 년의 섬김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방문 전 알아두면 실제로 도움이 되는 정보를 정리합니다.

  • 관람료는 무료이지만 주차료는 별도로 발생합니다. 경차(1,000cc 미만) 3,000원, 승용차 6,000원, 버스 등 대형 차량 9,000원입니다.
  • 전나무 숲길을 제대로 걷고 싶다면 일주문 쪽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이 정석입니다. 도보로 약 20~30분 소요됩니다.
  • 어르신이나 유아 동반이라면 금강교 근처 월정사 앞 주차장을 이용하면 경내까지 바로 진입할 수 있습니다.
  • 월정사 주차료 한 번 결제로 당일 상원사 주차장까지 이용 가능합니다. 시간 여유가 되면 상원사까지 차로 올라가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은 고려 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상륜부까지 완전한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출처: 국가유산청).

월정사 경내를 구경하다 보니 불교 방송 쪽에서 나와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찰 편집숍에 들러 제 띠에 맞는 염주도 하나 샀습니다. 좋은 기운이라도 조금 받아 가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가을 오대산에 들어설 기회가 생긴다면, 월정사의 전나무 숲길과 팔각구층석탑은 한 번쯤 직접 발로 확인해볼 가치가 분명히 있습니다. 천 년 전 고려인들이 쌓아 올린 탑 앞에서 풍경 소리를 들으며 소원을 빌어보는 경험은, 어떤 여행 안내서도 대신 전달하기 어렵습니다. 연휴를 피해 평일에 방문하면 주차 문제도 훨씬 수월하고, 숲길도 훨씬 조용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Vg61v8p09M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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