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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 동피랑 벽화마을 (공공미술, 달동네, 가족여행)

by hks1000 2026. 4. 11.

통영 동피랑 벽화마을 사진

여행지를 고를 때 "거기 뭐가 있어?"라는 질문보다 "거기 가면 어떤 느낌이야?"라는 질문이 더 정확할 때가 있습니다. 작년에 작은 아이 군 제대를 기념해 온 가족이 함께 통영을 찾았을 때, 저는 동피랑이라는 이름에서 단순한 관광지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습니다. 골목마다 담긴 색채와 삶의 무게가 뒤섞인 이 언덕마을은, 단순히 예쁜 벽화 사진을 남기는 것 이상의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그림 하나가 마을의 운명을 바꾼 이유

동피랑은 통영 시내 동쪽 언덕에 자리한 달동네로, 이름 자체가 '동쪽 벼랑'을 뜻합니다. 한때 통영시는 이곳을 재개발해 도로와 공원으로 만들 계획이었습니다. 철거 예정 지역, 노후 주택 밀집 지구, 그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낡은 달동네의 운명이 그대로 반복될 것처럼 보였지요.

그 흐름을 바꾼 것이 바로 공공미술(Public Art)이었습니다. 공공미술이란 미술관이나 갤러리 같은 폐쇄적 공간이 아닌, 일반 시민들이 생활하는 거리·광장·건물 외벽 등에 설치되거나 그려진 예술 작품을 의미합니다. 2007년 가을, 한 시민단체가 '색과 그림이 있는 골목'이라는 주제로 벽화 공모전을 열면서 전국의 미대생들과 예술가들이 모여들었고, 낡은 담벼락이 캔버스가 되었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보니 골목 어디에도 같은 그림이 없었습니다. 동백꽃, 바다 풍경, 인물화, 추상 패턴까지 그야말로 야외 미술관을 걷는 느낌이었습니다. 걷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큰 아이도 별다른 불평 없이 골목을 따라 걸었는데, 돌이켜 보면 시각적 자극이 지속적으로 이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알록달록한 색채가 발걸음의 피로감을 덜어주는 효과가 있다는 것,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실감했습니다.

공공미술이 도시재생(Urban Regeneration)에 미치는 영향은 국내 여러 사례에서도 확인됩니다. 도시재생이란 노후화된 구도심이나 주거지를 물리적 철거 대신 문화·경제적 활성화를 통해 되살리는 정책 방식입니다. 동피랑이 바로 그 교과서적 사례로 꼽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벽화 이후 방문객이 급증하면서 재개발 계획이 유보됐고,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지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림 하나가 철거 반대 현수막 수십 장보다 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한 셈입니다.

한국 도시재생 뉴딜사업 현황에 따르면, 전국 500여 곳에서 주민 참여형 도시재생 사업이 진행 중입니다(출처: 국토교통부). 동피랑은 그중에서도 정책이 아닌 예술이 먼저 마을을 살린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동피랑에서 마주친 삶의 온기와 현실

제가 동피랑을 단순한 관광 코스 이상으로 기억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골목 사이사이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 그게 다른 관광지와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었습니다.

벽화마을을 걷다 보면 대문이 열린 집, 빨래가 널린 마당, 창문 너머로 들리는 TV 소리를 자연스럽게 마주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동피랑의 매력이자 방문객이 지켜야 할 예의가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관광지화된 주거 지역에서 발생하는 주민 피해를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문제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특정 지역이 유명해지면서 외부 자본과 방문객이 유입되고, 이로 인해 기존 주민들이 오히려 살기 어려워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동피랑의 경우, 벽화 덕분에 재개발은 막았지만 과도한 관광객 유입이 또 다른 형태의 생활 침해로 이어진 측면도 있습니다. 예전 뉴스에서 서울 한옥마을 주민 인터뷰를 본 적이 있는데, 대문이 열려 있다고 무단으로 들어오거나 골목에서 소음을 유발하는 관광객 때문에 힘들다는 이야기가 동피랑에도 그대로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동피랑을 방문할 계획이라면 이 점만큼은 꼭 기억해 두셨으면 합니다.

  • 주민이 거주 중인 공간이므로 골목에서 큰 소리로 떠드는 행위는 자제할 것
  • 옥상이나 대문 안을 함부로 촬영하거나 들어가지 않을 것
  • 경사가 있는 언덕 골목이 많으므로 반드시 편한 신발을 착용할 것
  • 쓰레기는 반드시 지참 봉투에 담아 되가져올 것

저도 가족과 함께 천사날개 포토존 앞에서 한참을 기다려 사진을 찍었는데, 그 기다리는 시간조차 골목의 풍경을 천천히 즐길 수 있어서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벽화를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동포루 방향으로 발길이 이어집니다.

동포루에서 먹은 꿀빵, 그리고 통영 바다

동피랑 벽화 코스를 따라 언덕 끝까지 오르면 동포루 누각에 닿습니다. 동포루는 조선시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총지휘하던 통제영(삼도수군통제영, 세병관)을 수호하기 위해 구축된 초소 시설 중 하나입니다. 통제영이란 조선 선조 때 설치된 3도 해군 총사령부로, 현재의 통영 세병관이 그 역사적 흔적입니다. 이 군사 요충지에서 내려다보이는 통영 바다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은 솔직히 예상 밖이었습니다.

정자에 올라 앉아서 내려다보이는 통영항의 뷰는 걸어 올라오는 수고를 한 번에 씻어주는 경치였습니다. 저는 시장에서 미리 사온 통영 꿀빵과 충무김밥을 그 자리에서 꺼내 먹었는데, 바다 풍경이 반찬으로 따라오는 식사가 이런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꿀빵 생각이 계속 나서 온라인으로 따로 주문했을 정도입니다.

문화재청의 통영 세병관 안내 자료에 따르면, 세병관은 국보 제305호로 지정된 조선 후기 대표 관아 건축물로, 현존하는 조선시대 건물 중 단일 건물로서 바닥 면적이 가장 넓은 것 중 하나입니다(출처: 문화재청). 동포루는 그 통제영을 지키던 방어 거점으로, 역사적 맥락을 알고 오르면 단순한 전망대가 아닌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아이들이 다 크고 나면 가족사진 한 장 찍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날은 동포루에서도, 천사날개 앞에서도 같이 사진을 찍어줘서 고마웠습니다. 남는 것은 결국 사진이라는 걸, 그날 새삼 실감했습니다.

동피랑은 그림이 예쁜 곳이기 이전에, 삶이 담긴 곳입니다. 재개발의 위기를 예술로 넘기고, 지금도 그곳에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이 마을을 단순한 포토존과는 다른 차원으로 만들어 줍니다. 통영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꿀빵 하나 손에 들고 동피랑 골목을 천천히 걷고, 동포루 정자에 잠시 앉아 통영 바다를 바라보는 시간을 꼭 가져보시길 권합니다. 서두르지 않고 골목의 온기를 느끼며 걷는 것, 그게 동피랑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HMPSuwRr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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