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이와 얼굴만 마주치면 분위기가 싸해지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큰아이가 사춘기에 접어들면서 저도 아이도 서로가 서로에게 지쳐가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혼자 통도사 템플스테이 1박 2일을 신청했습니다. 가족의 구애 없이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는 것만으로도 출발 전날 밤부터 설렐 정도였습니다.
통도사 암자순례와 발우공양, 천년 산사의 하루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사찰로, 불보사찰(佛寶寺刹)로 불립니다. 불보사찰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사찰이라는 의미로, 통도사 금강계단에는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부처님 사리가 지금도 모셔져 있습니다. 그래서 통도사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이 이미 그 자리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사실을 알았을 때는 꽤 놀라웠습니다.
제가 참가한 것은 체험형 프로그램 중 암자순례 코스였습니다. 통도사 경내에는 무려 19개의 산내 암자가 있습니다. 산내 암자란 큰 사찰에 속해 있으면서 독립적으로 수행이 이루어지는 작은 절을 뜻합니다. 평소 자장암이나 서운암은 개인적으로 다녀온 적이 있었지만, 스님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각 암자가 지닌 역사적 맥락과 수행적 의미를 알고 나니, 이전에 그냥 지나쳤던 석등 하나, 석탑 하나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숲길을 따라 걷는 동안 피톤치드가 머릿속을 맑게 씻어주는 느낌이 들었고, 출발 전까지만 해도 머릿속에 꽉 차 있던 아이와의 갈등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아이 생각보다 발밑의 낙엽 소리에 집중하게 되는 순간, 그게 이미 수행의 시작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저녁에는 발우공양(鉢盂供養)을 했습니다. 발우공양이란 스님들이 수행의 일환으로 행하는 전통적인 식사 방식으로, 정해진 그릇에 음식을 담아 남기지 않고 깨끗이 비운 뒤 물로 씻어 마시는 방식입니다.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는데, 밥 한 숟가락에도 얼마나 많은 손길이 담겨 있는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시간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집에서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도 귀찮게 여겼던 적이 있었는데, 발우를 앞에 두고 앉아 있으니 그런 날들이 부끄럽게 떠올랐습니다.
통도사 템플스테이에서 선택할 수 있는 주요 프로그램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휴식형: 정해진 일과 없이 경내 자유 산책과 명상 중심. 공양 시간과 예불 시간만 참여하면 나머지는 자유입니다.
- 체험형 (암자순례): 스님의 안내로 19개 산내 암자 중 주요 암자를 순례하며 사찰 문화와 역사를 배웁니다.
- 108배 및 염주 만들기: 번뇌를 내려놓는 수행 체험입니다.
- 스님과의 차담: 법랍(法臘) 높은 스님과 차를 마시며 삶의 고민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법랍이란 스님이 출가한 이후의 연수를 뜻하는 불교 용어입니다.
새벽 108배와 스님과의 차담, 그게 저를 바꿨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108배를 했습니다. 108배란 불교에서 중생이 지닌 108가지 번뇌를 하나씩 내려놓는다는 의미로, 절 한 번을 올릴 때마다 자신을 비워낸다는 수행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스님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절을 올리는데, 20번을 넘기기 전부터 이마에 땀이 맺혔습니다. 평소에 절에 가면 기본 삼배씩은 올리는 편이라 조금 자신이 있었는데, 108번이라는 숫자는 제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달랐습니다.
절 하나를 올릴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힘든데, 아이와의 감정 다툼에 이 에너지를 다 쓰고 있었던 게 맞는 건가. 부질없다는 말이 몸으로 와닿는 순간이었습니다. 108배를 마치고 염주를 손수 만들었는데, 그때 만든 염주를 지금도 팔에 차고 다닙니다. 뭔가 대단한 의미를 붙이려는 게 아니라, 그날 새벽의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아서입니다.
차담 시간은 솔직히 기대를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스님이 하는 말씀이 제 상황에 얼마나 닿을까 싶었거든요. 그런데 제가 아이와의 사춘기 갈등을 꺼내자 스님이 하신 말씀은 단 한 가지였습니다. "당신 학생 때 어머니한테 어떻게 했습니까?" 그 한마디에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습니다. 제가 사춘기 때 엄마에게 했던 말투와 행동이 떠오르는데, 지금 아이가 하는 것들과 다를 게 없었습니다.
템플스테이 참가자들이 이 시간을 가장 기다리는 이유가 있습니다. 법랍 높은 스님과 일대일로 마음을 나눌 기회가 일상에서는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관계의 과잉이라는 말을 스님에게서 처음 들었는데, 현대인이 지쳐 있는 이유가 너무 많은 관계를 유지하느라 정작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꽤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템플스테이가 심리적 회복에 실질적인 효과가 있다는 것은 경험자들의 후기만으로 확인되는 게 아닙니다. 한국관광공사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외국인 방문객들이 한국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체험 1위로 템플스테이를 꼽았습니다(출처: 한국관광공사). 마음 챙김(Mindfulness) 기반 프로그램이 스트레스 감소와 심리적 안정에 효과적이라는 연구도 국내외에서 지속적으로 발표되고 있습니다. 마음 챙김이란 현재 이 순간에 의도적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판단 없이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명상 수련 방식입니다(출처: 한국명상학회). 108배와 암자 산책이 바로 이 마음 챙김 수련의 형태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템플스테이는 단순한 관광 그 이상의 가치를 갖고 있습니다.
저는 템플스테이를 꼭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충분히 의미 있는 경험이 된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반면 일부에서는 종교적 색채가 강해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직접 겪어보니 강요되는 것은 없었습니다. 스님들도 참가자의 종교나 배경을 묻지 않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페이스대로 참여하면 됐습니다.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는 순간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입니다. 그 선택지 중 하나로 통도사 템플스테이를 진지하게 권하고 싶습니다. 관광지 같은 화려함은 없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왜 이렇게 몸이 가볍고 생각이 맑아졌는지, 막상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제 경험상 그 감각은 꽤 오래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