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찰 여행은 그냥 구경 가는 거 아닌가요?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통도사 자장암 툇마루에 앉아 영축산 능선을 바라보던 순간, 이 길이 단순한 관광이 아니라는 걸 몸으로 느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통도사, 그 품 안의 19개 암자를 걷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깊은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자장암에서 마주한 것들, 금와보살과 영축산 능선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한 불보사찰(佛寶寺刹)입니다. 불보사찰이란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 즉 부처님의 실제 유골을 봉안한 사찰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통도사 금강계단(金剛戒壇)에는 불상이 따로 없습니다. 사리 자체가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알고 나서 통도사를 다시 바라보니 느낌이 전혀 달랐습니다(출처: 문화재청).
제가 처음 자장암을 찾아간 건 아이가 고3이던 해 가을이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엔 수능 기도를 목적으로 갔던 것이지, 암자 자체에 큰 기대는 없었습니다. 그런데 자장암에는 금와보살(金蛙菩薩)이라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금와보살이란 법당 뒤편 암벽의 손가락 하나 겨우 들어갈 만한 작은 바위 구멍 속에 산다는 금색 개구리를 말합니다. 예로부터 이 금개구리를 직접 보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류의 전설은 보고 싶은 사람 눈에만 보인다고들 하는데, 저는 그날 실제로 바위틈 속에서 금색 빛을 띤 개구리를 목격했습니다. 함께 간 친구들도 "봤다"고 했으니 제 착각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서로 신기해하면서도 결국 입 밖에 나오는 말은 "우리 애 수능 잘 보게 해달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 당시엔 그랬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장암에서 제 마음을 움직인 건 금와보살이 아니었습니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눈앞에 펼쳐진 영축산의 능선을 바라봤을 때, 병풍처럼 둘러선 산줄기가 암자와 너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어서 잠시 멍하니 있었습니다. 자장암의 8할은 저 능선이 만들어 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애불(磨崖佛)이 새겨진 깎아지른 암벽도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애불이란 자연 암벽이나 바위 면에 직접 새긴 불상을 의미하는데, 이 척박한 돌 위에서 수행을 이어간 옛 스님들의 구도 정신이 절로 느껴져 저도 모르게 숙연해졌습니다.
보름날이라 법회가 있었는지 암자에서는 방문객마다 떡과 과일, 과자를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제가 직접 받아 먹어봤는데, 그 평범한 인절미 한 조각이 왜 그리 맛있던지. 바람이 불 때마다 처마 아래 풍경(風磬)이 맑게 울렸고, 그 소리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조금씩 비워지는 기분이었습니다. 풍경이란 처마 끝에 매달아 바람에 흔들려 소리를 내는 작은 종으로, 산사의 정적을 깨우는 소리이자 번뇌를 씻어내는 상징으로 여겨집니다. 아이 수능 걱정으로 꽉 차 있던 마음이, 그날만큼은 오히려 제 자신을 위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백련암과 무풍한송로, 순례길을 제대로 걷는 법
자장암을 내려온 뒤 찾아간 곳은 백련암이었습니다. 백련암은 저한테 개인적으로 더 각별한 곳입니다. 친정어머니와 이모들이 자주 드나들던 암자였고, 외할머니께서 불공을 드리러 오시던 곳이기도 해서 처음 방문임에도 낯설지 않았습니다.
백련암으로 향하는 길은 우거진 나무들이 터널을 이루고 있어, 걷는 것만으로 머릿속이 정리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암자 입구에 들어서면 정갈하게 손질된 마당과 작은 연못이 반겨줍니다. 이름처럼 하얀 연꽃이 산속에 핀 듯 단아한 분위기가 자장암과는 또 달랐습니다. 자장암이 웅장하고 신비로운 느낌이라면, 백련암은 조용하고 집중된 분위기입니다. 사람도 적어서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더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법당 앞에서 바라보는 영축산의 짙은 녹음은 여름에 보니 더 선명하고 풍성하게 다가왔습니다.
통도사 19개 암자 순례길 전체를 하루에 완주하는 것은 약 20km가 넘는 산행을 포함하기 때문에 상당한 체력이 필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종주는 하루 만에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각 암자가 지닌 고유한 분위기와 역사적 배경을 오롯이 느끼려면, 몇 번으로 나누어 방문하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순례(巡禮)란 종교적 의미가 있는 장소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차례로 돌아보는 행위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처럼 걷는 과정 자체가 수행이 됩니다. 통도사 암자 순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빠르게 19개를 체크하는 것이 목적이 되는 순간, 이 길의 의미는 절반쯤 사라집니다.
통도사 19개 암자 중 주요 탐방 시 참고할 사항은 다음과 같습니다.
- 극락암, 비로암, 자장암처럼 암자마다 주요 성보(聖寶)와 역사적 의미가 다르므로, 방문 전 간략한 배경 지식을 확인하면 훨씬 풍부하게 볼 수 있습니다.
- 배구남(대구남)처럼 샘물과 식수가 제공되는 암자가 있으니, 장거리 산행 시 식수 보충 포인트를 미리 파악해 두는 것이 좋습니다.
- 무릎 보호대와 등산 스틱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영축산 정상(해발 1,058m) 구간이 포함될 경우 특히 하산 시 무릎에 부담이 집중됩니다.
- 순례를 마치고 내려오는 마지막 길, 무풍한송로(無風寒松路)는 반드시 걸어보시길 권합니다. 무풍한송로란 수백 년 된 소나무들이 줄지어 선 통도사의 진입로를 이르는 이름으로, 종주의 피로를 씻어주는 마지막 선물 같은 길입니다.
2023년 기준, 통도사를 포함한 한국의 산지 승원 7곳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국내 사찰 문화의 가치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출처: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순례가 끝난 뒤에 느껴지는 가벼움은 운동 후의 상쾌함과는 다릅니다. 무언가를 내려놓고 왔다는 감각에 가깝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봤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꼭 불교 신자가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수천 년간 이어온 수행자들의 발자취를 따라 걸으며 자신을 비우는 시간, 통도사 암자 순례는 그런 여정입니다. 아직 절반도 못 돌아봤지만,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습니다. 남은 암자들을 하나씩, 천천히 걸어볼 작정입니다. 4월의 따뜻한 햇살이 내리는 지금이 가장 좋은 계절이기도 합니다. 한번 시간이 닿는다면, 이 길을 꼭 걸어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