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0년간 한 가문이 지켜온 대나무숲이 부산 기장에 있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저는 작년 5월 해운대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기장 철마의 아홉산 대나무숲을 방문했습니다. 영화 '군도'와 드라마 '더 킹: 영원의 군주' 촬영지로 유명한 이곳은 남평문씨 가문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대를 이어 보존해온 사유지입니다. 해운대 광안리에서 차로 30분이면 도착하는 거리임에도 마치 다른 세계에 온 듯한 몽환적인 풍경이 펼쳐지는데요, 과연 입장료 8,000원의 가치가 있을까요?
하늘 찌를 듯 솟은 맹종죽, 400년 역사의 대나무 군락지
아홉산숲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건 중국에서 들여온 맹종죽(孟宗竹) 군락지입니다. 여기서 맹종죽이란 대나무 중에서도 가장 크게 자라는 종으로, 높이가 20m까지 자라며 줄기 직경도 일반 대나무보다 훨씬 굵습니다. 100년 전 이 땅에 처음 심어진 맹종죽은 지금 하늘을 가릴 만큼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대나무 잎사귀 사이로 빛이 새어들어오는 광경이 황홀했습니다. 저는 전국의 유명한 대나무숲을 몇 군데 가봤지만, 아홉산만큼 몽환적인 느낌을 주는 곳은 처음이었습니다. 특히 대나무 뿌리 체계(根系)가 얽히고설켜 땅속 깊이 퍼져 있어 다른 식물이 거의 자랄 수 없다는 설명을 듣고 나니, 이 숲의 생태적 가치가 더욱 와닿았습니다. 뿌리 체계란 식물의 뿌리가 땅속에서 형성하는 구조를 말하는데, 대나무는 뿌리가 수평으로 넓게 퍼지는 특성 때문에 군락을 이루면 다른 나무가 침투하기 어렵습니다(출처: 국립수목원).
솔직히 5월 중순 방문이라 걷는 동안 약간 덥긴 했지만, 대나무가 만들어주는 그늘 덕분에 크게 더운 줄 몰랐습니다. 바닥에는 짚 같은 매트가 깔려 있어 폭신폭신한 감촉이 발에 전해지면서 피로감도 덜했습니다. 영화 '군도'에서 봤던 그 장면이 바로 이곳에서 촬영됐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드라마 소품으로 남겨진 장치들이 더욱 특별하게 느껴졌습니다.
영남권 유일, 금강송 군락지가 주는 생태적 가치
대나무숲을 지나 조금 더 걸어 올라가면 금강송(金剛松) 군락지가 나타납니다. 여기서 금강송이란 강원도 일대에서 주로 자라는 소나무 변종으로, 일반 소나무보다 줄기가 곧고 마디가 길며 속이 꽉 차 있어 건축 자재로 귀하게 쓰였던 수종입니다. 실제로 2008년 화재로 소실된 숭례문을 복원할 때도 강원도 삼척과 양양의 금강송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출처: 문화재청).
제가 이곳을 방문하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영남권에서 이렇게 큰 금강송 군락지를 온전히 볼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수탈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국적으로 큰 나무들이 대부분 베어졌지만, 남평문씨 가문이 400년간 묵묵히 지켜낸 덕분에 이 숲은 살아남았습니다. 금강송의 감상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입니다.
- 붉은 줄기: 금강송은 수피(樹皮)가 일반 소나무보다 얇고, 윗부분으로 갈수록 붉은빛이 강하게 돋아 햇빛을 받을 때 독특한 색감을 자랑합니다.
- 피톤치드 산책: 맹종죽 숲을 지나 금강송 군락에 들어서면 대나무와는 전혀 다른 진한 솔향기를 맡을 수 있습니다. 피톤치드(Phytoncide)란 나무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천연 물질로, 사람의 심리적 안정과 면역력 향상에 도움을 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영화 촬영지: 대나무와 금강송이 어우러진 구역은 몽환적인 분위기 덕분에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 자주 사용되었습니다.
저는 집에 돌아와서 넷플릭스로 '더 킹: 영원의 군주'를 다시 찾아봤습니다. 제가 직접 걸었던 그 숲길이 드라마 속 어느 장면에서 나왔는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화면 속 배경이 제 기억 속 풍경과 겹치는 순간, 그곳이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영상 콘텐츠 제작자들이 인정한 미적 가치를 지닌 공간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습니다.
아홉산숲을 천천히 둘러보는 데는 약 1시간 정도가 걸렸습니다. 길은 대체로 평탄했지만, 간혹 언덕길이 있어 운동화 착용은 필수입니다. 주차장은 생각보다 협소해서 성수기에는 주차 공간을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릴 수 있으니, 가능하면 평일 오전 방문을 추천합니다.
부산에 살면서도 이런 숲이 가까이 있다는 게 행운처럼 느껴졌습니다. 입장료 8,000원이 조금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400년간 사유지를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관리해온 가문의 노력을 생각하면 충분히 합리적인 가격이라고 봅니다. 부산을 찾는 관광객이든 부산 시민이든, 힐링이 필요한 순간 아홉산숲을 찾아 대나무 향과 솔향을 마음껏 마시며 자연 속에서 쉬어가길 바랍니다.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인생 사진이 나오는 이곳에서, 일상의 무게를 잠시 내려놓고 400년 세월이 지켜온 자연의 품에 안겨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