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솔직히 저는 경주를 몇 번이나 방문했으면서도 왜 이곳이 "지붕 없는 박물관"이라 불리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냥 불국사 보고, 첨성대 사진 찍고, 안압지 야경 보는 게 전부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경주 역사 유적지구를 제대로 알고 나니, 제가 그동안 경주 여행에서 얼마나 많은 걸 놓쳤는지 깨달았습니다.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경주 역사 유적지구는 대릉원, 월성, 남산, 산성, 황룡사 총 다섯 개 지구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지구마다 천년 신라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품고 있었습니다.
대릉원과 월성 지구가 보여주는 신라 왕실의 흔적
경주에서 당일치기 여행을 계획하신다면 가장 먼저 부딪히는 문제가 "어디부터 가야 하지?"입니다. 저도 남편과 함께 경주를 방문했을 때 이 고민 때문에 시간을 꽤 낭비했거든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대릉원 지구부터 시작하는 게 가장 효율적입니다.
대릉원 지구는 신라 왕족과 귀족들의 고분군이 밀집된 곳으로, 그 면적이 축구장 180배에 달합니다. 여기서 '고분군(古墳群)'이란 오래된 무덤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지역을 의미합니다. 황남리, 노동리, 노서리로 구획이 나뉘는데, 특히 노서리 고분군에서는 우리나라 최초로 금관이 발견된 금관총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걸어본 느낌으로는, 이곳의 푸른 잔디밭과 둥근 고분들이 만들어내는 곡선의 조화가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대릉원에서 발견된 유물들의 가치는 실로 대단합니다. 천마도가 출토된 천마총, 58,000점의 유물이 나온 황남대총 등에서 신라 예술의 정수를 확인할 수 있죠. 조선시대 사람들은 이 거대한 고분들을 그저 작은 산으로 착각했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아이러니합니다(출처: 문화재청).
대릉원을 둘러본 후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첨성대를 지나면 월성 지구에 도착합니다. 월성은 신라의 왕궁터로, '월(月)'자가 달을 뜻하는 것처럼 위에서 보면 반달 모양이라 반월성이라고도 불립니다. 최근 복원된 해자(垓字)를 보면 당시 왕궁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는데, 여기서 해자란 성벽 주위를 둘러 파서 물을 채운 방어용 도랑을 말합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신라 전성기에는 경주에 17만 호가 살았다고 합니다. 한 가구당 5명만 계산해도 최소 85만 명, 현재 경주 인구 25만 명의 3배가 넘는 규모였던 셈입니다. 월성에서 첨성대를 내려다보면, 이 일대에 얼마나 많은 신라인들이 북적이며 살았을지 상상이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월성의 복원된 해자를 보면서 신라인들의 토목 기술에 감탄했습니다. 이런 거대한 구조물을 컴퓨터 시뮬레이션도 없이 정확하게 설계하고 시공했다는 게 믿기지 않더군요. 아이들과 함께 방문했을 때는 경주박물관에서 성벽과 해자 모형을 만드는 체험 프로그램에 참여했는데, 아이들이 직접 만들어보면서 신라의 건축 기술을 이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황룡사지와 남산 지구에 담긴 신라 불교문화
경주 여행에서 많은 분들이 불국사만 보고 가시는데, 솔직히 황룡사지를 놓치면 신라 불교문화의 절반을 놓치는 겁니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부터 세워지기 시작해 선덕여왕 때 구층목탑이 완성되기까지 거의 한 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신라 최대의 사찰이었습니다.
황룡사 구층목탑의 높이는 약 80m로, 현재 아파트 30층 높이에 해당합니다. 신라 어디서든 이 탑이 보였을 테니,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니라 왕권의 상징이자 삼국 통일의 염원을 담은 국가적 상징물이었던 셈입니다. 지금은 터만 남아있지만, 황룡사 금당 치미(鴟尾) 등 출토된 유물들을 보면 당시의 위용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치미란 건물 지붕 양 끝에 올리는 장식 기와로, 화재를 막는 벽사(辟邪)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황룡사지 근처의 분황사에는 국내 유일의 모전석탑(模塼石塔)이 있습니다. 모전석탑이란 전탑(벽돌탑)을 모방하여 돌로 쌓은 탑을 의미하는데, 분황사 모전석탑은 신라 장인들이 돌을 마치 벽돌처럼 정교하게 다듬어 쌓아올린 걸작입니다. 저는 이 탑 앞에 서서 한참을 들여다봤는데, 1400년 전 기술로 어떻게 이렇게 정밀하게 돌을 가공했는지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출처: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남산 지구는 신라인들의 종교적 염원이 집약된 곳입니다. 남산에는 수많은 불상과 마애불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칠불암은 남산 불상의 백미로 꼽힙니다. 신라인들은 일곱 부처가 머무는 칠불암에서 세상의 안녕과 개인의 평안을 기원했죠.
작년 가을에 저는 경주 남산을 트레킹하면서 칠불암을 직접 방문했습니다. 등산로가 다소 험하긴 했지만, 정상에 올라 칠불암의 불상들을 마주했을 때의 그 경외감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천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서 중생을 바라보는 부처님의 미소를 보며, 신라인들이 느꼈을 마음의 평안이 조금은 이해가 됐습니다.
경주의 산성 지구는 비교적 최근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추가된 곳입니다. 경주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 지형인데, 신라인들은 이 자연 지형을 활용해 도시 곳곳에 방어용 산성을 쌓았습니다. 명활산성, 서악산성 등이 대표적인데, 이 산성들을 통해 신라가 천년 왕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전략적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이라 표현했듯이, 신라 경주는 절과 절이 하늘의 별처럼 펼쳐지고 탑과 탑이 기러기 무리처럼 줄지어 선 도시였습니다. 이보다 더 적절하게 천년 고도 경주를 표현할 말이 있을까요?
저는 경주를 갈 때마다 새로운 걸 발견합니다. 처음엔 그냥 유명한 관광지만 찾아갔다면, 이제는 각 유적지에 담긴 역사적 의미와 신라인들의 삶을 상상하며 걷게 됩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방문할 때는 경주박물관의 체험 프로그램을 적극 활용하시길 추천합니다. 다보탑과 석가탑 만들기, 첨성대 모형 제작 등의 체험을 통해 아이들이 역사를 훨씬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되더군요.
경주 역사 유적지구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살아있는 역사 교육장입니다. 당일치기로 다녀오기엔 아쉬움이 너무 크니, 가능하면 최소 1박 2일 코스로 여유 있게 둘러보시길 바랍니다. 저도 다음번엔 2박 3일로 계획해서, 이번에 미처 못 본 남산 트레킹 코스와 산성 지구를 제대로 돌아볼 생각입니다. 천년의 시간을 간직한 경주, 우리가 잘 보존하고 지켜서 다음 세대에 온전히 물려줘야 할 소중한 문화유산입니다.